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령 전투 (문단 편집) === 조선측의 기록 === > ○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 >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전진해 오니, 아군이 나가 맞이하여 한 번 싸워 용감하고 건장한 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木柵)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安東營將)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 > 또 우진에 닥쳐오므로 민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포환을 일제히 발사하니 맞은 자가 바로 죽었다.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므로 승전할 기세가 있었으나, 화약을 또한 단지 2냥씩만 주었기 때문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적이 이때를 틈타서 총돌격하니 마침내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처음에 선약해가 남산 위에 진을 옮기자고 세 번 청하였으나 민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 감사 심연(沈演)이 화완이 도망쳐 살아 있다고 치계하였기 때문에 증지과 사제(賜祭)의 은전이 민영에게 미치고 허완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허완의 아들 장()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연후에 증제(贈祭)하였다. >----- > - [[연려실기술]]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소집된 경상도 속오군 4만명[* 다만 경상도 속오군만이 참가한 것은 아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 구원을 위해 북상했다가 험천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충청도 속오군이 합류해 싸웠다. 공식 편제대로라면 경상도 속오군은 총 2만 2448명, 1628년에 경상감사가 인조에게 보고한 병력은 2만 4천 명이었다.]은 동원되는 대로 그대로 북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집결중이던 병력이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시|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로 구성된 청의 병력과 조우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은 경상 우병사 민영과 경상 좌병사 허완이었으며 군사들 중 일부는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쌍령 지역은 절대 4만 명의 대병력이 모두 주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쌍령 전투에 휘말린 병력은 최대 8천여명 쯤으로 추정된다. [[임용한]] 박사는 장부상 병력 4만에 실제 급하게 소집된 군대는 8천이고 이중 쌍령에 실제로 집결하여 청군과 싸운 선발대는 2천명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하지만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의 병력 수도 전체 병력이라기보다는 돌격전을 펼친 기병들만의 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전체 병력 면에선 오히려 조선군이 청군보다도 더 적었을 공산이 크다.] 또한 [[임용한]] 교수는 '''학계에서도 '조선군 4만명설'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취급한다고 설명하였다.''' [[https://youtu.be/K9L3BmimrFM?t=1490|출처]] 제대로 동원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매우 부적절한 지형에서 대량의 팔기와 마주처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속오군을 동원중이던 지휘관들이 죄다 몰살당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자세한 전투 양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데, 급히 동원되어 집결하면서 북상하던 서로 흩어진 병력이 다발적으로 갑자기 쌍령에서 청군과 만나 싸운 만큼 전투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군이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구체적으로 어느정도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쌍령 전투 이후 무려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전투 당시 [[청나라]]군의 선봉 33명이 나무 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세강이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 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 '''하지만''' 당시 실록의 기록에선 분명 허완이 분전하다가 스스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03028_002|비국에서 허완을 추증하기를 청하다]] 다른 설에선 청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그나마 평지였기 때문인지 다수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지휘부가 전멸하여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참고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출병을 할때 눈물을 흘렸고, 그 주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며 통곡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허완은 후술하겠지만 오랜 경력을 가지고 능력을 인정받은 장수라 연려실기술의 이 묘사는 부정확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단, 연려실기술의 묘사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수 차례 격전 후에 생긴 PTSD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일 수도 있다. 이는 현대의 군인들도 흔히 겪는 일이고, 노령으로 인한 다른 신경정신과 질환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역사적 맹장이라고 해서 [[엄마도 사람이야 사람|평생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야한다]]는 보장도 없다.] 어쨌든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토대로 계속 상황을 복원해보면 당시 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모두 소모[* 정확히는 탄약 2냥이었다고 한다(남급본 병자일기 + 병자록의 기록). 현재 자동 소총으로 10발이면 연사 시 1초, 2초요 단발 조준 사격으로도 몇분 안되어 다 쓰기에 적은 양으로 느껴지지만 전근대 총으로는 [[업복이|제일 빠른게 20초에 한발]]이었고 적이 다가오기를 충분히 기다려서 쏘면 이후 또 쏠 기회가 많지 않기에 10발도 적은 수라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 서양도 [[12사도(총기)]]라고 부르는 12발의 장전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한 전투에서 12발을 다 사용할 경우 매우 격렬한 전투를 했다고 평가하였으니 전장식 소총에서 10발은 그다지 적은 보급이 아니다. 이는 최전선 지휘관의 팀킬로 인한 사격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적을 사살하지도 못한 채 낭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승전인 김화 전투에서 유림이 철저한 사격통제로 청군이 10보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과 크게 대비된다.]한 탓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모두 폭발하는 바람에(단, 이 폭발사고 기록도 당대 실록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기록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결국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 때 [[팔기군]] 300기가 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그대로 붕괴됐고, 진을 친 곳도 후퇴에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을 당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을 보면 허완의 부대가 입은 피해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민영의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했다는 기술이 있다. 또한 '''저 청군 300기에 대한 기록은 막상 실록이나 청측의 기록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이렇게 청군이 조선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과확대전을 벌였기에 조선군의 지휘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용인 전투 때와 달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01015_001|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천 6백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7만의 병력 중 1천이 전사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생환했으나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건재했으나 이 패배를 접하고 사기가 꺾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조령에서 대기해야 했고, 이후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한 채 적과 마주쳐 크게 패배한 참패였겠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